나는 어떻게 치과의사가 되었을까? > 벚꽃치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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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치과 이야기

Cherry blossom Dental Clinic


  • 나는 어떻게 치과의사가 되었을까?

  • 작성일 22-08-05

    조회수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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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과의 홈페이지에 저의 이야기를 써야만 할 것 같다는 약간의 강박에 사로잡혀서 어떤 얘기를 처음 써야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친 끝에 결국은 제가 치과의사가 된 이야기를 먼저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뭐 거창한 스토리도 아니고 다른 원장님들처럼 사명감에 넘치는 이야기도 아니라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의 솔직한 얘기를 풀어가 볼까 합니다.
     전 어렸을 때 꿈이 없었습니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어떤 직업들이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고향은 온통 논, 밭 뿐인 시골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사람들도 학교의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거의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 뿐이라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었습니다. 학교에서 매년 실시하는 장래희망을 물을 때면 뭐가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얘기하시던 변호사가 되겠다고 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TV나 영화를 보면 가난한 남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나 변호사가 되는 성공스토리가 아주 많았었거든요. 그래서 “자수성가”하면 자연스럽게 사법고시에 패스한 법조인을 떠올렸던 때고 아버지도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에 가게 되었을 즈음에 처음으로 의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건 저의 고민이 아니었고 저의 삼촌들의 추천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어떤 것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은근 의학계열로 진학하는 건 어떨지 얘기하긴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학까지 가서 또 고등학생처럼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비위도 약한 편이라 피 보는 일도 무섭기도  했구요. 그래서 결정하게 된 것이 ‘유전공학’이었습니다. 당시에 최첨단 학문으로 굉장히 멋져보였거든요. 그렇게 그럭저럭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도 하고 회사를 다녔지만 회사는 저랑은 안 맞는 곳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안 좋은 일이 자꾸 터지고 왠지 어떤 목표로 일을 해야 하는지도 장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능력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저도 모르는 강력한 힘이 절 자꾸 회사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공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데 그 길은 잘 보이지 않고 회사는 절 자꾸 밀어내고 저의 사회생활 능력은 너무 없고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치과의사가 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무모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고 위험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거대한 힘이 절 그쪽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렇게 저는 두 번째 회사까지 그만두고 결국 치의학전문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게 됩니다. 운이 좋았는지 다행히도 첫해에 합격하여 지금은 이렇게 치과를 개원하고 진료를 하고 있네요. 여기까지가 제가 치과의사가 된 이야기입니다.
     진료로 봉사하겠다던가, 치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던가,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약간의 창피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치과의사가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버님의 기대감과 기다림이 아니셨나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뭔가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룬 것 같은데요.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 그래도 제가 한 직업을 선택하게 되고 밥벌이 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제가 초등학교 1학년 첫 시험을 보고 난 후 일어났던 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7살에 입학했습니다. 보통 입학하는 학생들보다는 1년 앞섰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 친구 분들은 제가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고 내년에 다시 보내라고들 하셨다고 합니다. 입학 직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거나 지시를 내리면 저는 선생님을 쳐다보지 않고 땅바닥에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네요. 그래서 아버지도 큰 기대를 하고 계시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첫 시험 전 까지는요. 그렇게 첫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제가 그때 세과목 모두 백점을 받았습니다. 그때 당시 학교까지 3.5km를 걸어 다니던 때였고 아버지는 제가 너무 작아서 1학기만 매일 오토바이로 태워 주시고 또 태워 오시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방과시간 즈음이면 아버지는 학교 창문 밖에서 절 쳐다보곤 하셨었지요. 첫 시험을 치르고 채점된 시험지를 받아보던 날에도 아버지는 창문너머로 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시험지를 받아서 점수를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창문밖에 계시던 아버지에게 뛰어가 자랑을 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 시험지를 한참 나누어 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아버지는 그 시험지를 보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그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 아버지의 얼굴이 아마도 저를 지금까지도 붙들고 안 놓아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도 없었고 뭘 해야 될지도 몰랐지만 다만 아버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성적이 좋지 않거나 실패할 때도 늘 아버지는 넌 잘할 수 있다. 다음엔 더 잘할 거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한 번도 저를 나무라거나 혼내신 적이 없으셨어요. 오히려 그게 더 무섭다고 해야 할까요? 아버지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살게 되었거든요.
     치과의사가 되고 난 지금도 사실은 아버지가 우리 아들 치과의사다 이렇게 자랑도 해주시고 뿌듯하게 생각해주시는 것이 제일 힘이 됩니다.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첫 시험 날의 아버지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언제나 인자하게 웃어주실 줄만 알았는데 요즘은 자꾸 화를 내시고 성격이 난폭해지십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화 한번 안내시던, 항상 너는 잘 할 거라고 격려해주시던, 저의 첫 시험지를 보고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고, 또 대학합격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눈시울이 붉어지시며 웃으시던 아버지인데 요즘은 달라진 모습에 너무 속상합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도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착하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남들에게 해 끼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는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나이가 이렇게나 많이 들었는데 저는 아직도 7살 첫 시험지를 받아든 꼬맹이로 살고 있나 봅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타던 경차 대신에 좀 더 크고 좋은 차를 구입하게 됐습니다. 경차도 불편함이 하나도 없었는데 아버지를 뵈러 장거리를 이동하기에는 많이 피곤하더군요. 더 편안한 차도 구입하였으니 이젠 더 자주 아버지를 뵈러 갈까 합니다. 그래도 제가 가면 아버지가 제 손도 꼭 잡아주시고 예전처럼 환한 미소를 보여주시거든요.
     저의 첫 이야기는 어쩌다 보니 매우 낯간지러운 글이 되고 말았네요. 다음에는 치과에서 있었던 일상들, 소소한 이야기들을 풀어가 볼까 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어떤 주제의 글이 올라올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글 솜씨가 좋지 않다 보니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두 번째 글이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까지 벚꽃치과를 방문해 주신 환자분들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 항상 행복하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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