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치과의사가 되었을까?
작성일 2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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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 홈페이지에 저의 이야기를 써야만 할 것 같다는 약간의 강박에 사로잡혀서 어떤 얘기를 처음 써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친 끝에 결국은 제가 치과의사가 된 이야기를 먼저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뭐 거창한 스토리도 아니고 다른 원장님들처럼 사명감에 넘치는 이야기도 아니라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의 솔직한 얘기를 풀어가 볼까 합니다.
전 어렸을 때 꿈이 없었습니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어떤 직업들이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고향은 온통 논, 밭 뿐인 시골이었고 제가 아는 사람들도 학교의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거의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 뿐이라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었습니다.
학교에서 매년 실시하는 장래희망을 물을 때면 뭐가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얘기하시던 변호사가 되겠다고 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TV나 영화를 보면 가난한 남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나 변호사가 되는 성공스토리가 아주 많았었거든요.
그래서 자수성가하면 자연스럽게 사법고시에 패스한 법조인을 떠올렸던 때고 아버지도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중, 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에 가게 되었을 즈음에 처음으로 의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건 저의 고민이 아니었고 저의 삼촌들의 추천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어떤 것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은근 의학 계열로 진학하는 건 어떨지 얘기하긴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학까지 가서 또 고등학생처럼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비위도 약한 편이라 피 보는 일도 무섭기도 했구요.
그래서 결정하게 된 것이 유전공학과였습니다. 당시에 최첨단 학문으로 굉장히 멋져 보였거든요.
그렇게 그럭저럭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도 하고 회사를 다녔지만 회사는 저랑은 안 맞는 곳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안 좋은 일이 자꾸 터지고 왠지 어떤 목표로 일을 해야 하는지도, 장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능력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저도 모르는 강력한 힘이 절 자꾸 회사라는 집단에서 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공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데 그 길은 잘 보이지 않고 회사는 절 자꾸 밀어내고 저의 사회생활 능력은 너무 없고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치과의사가 되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무모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고 위험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거대한 힘이 절 그쪽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렇게 저는 두 번째 회사까지 그만두고 결국 치의학 전문 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게 됩니다.
운이 좋았는지 다행히 첫해에 합격하여 지금은 이렇게 치과를 개원하고 진료를 하고 있네요.
여기까지가 제가 치과의사가 된 이야기입니다.
진료로 봉사하겠다던가, 치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던가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약간의 창피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치과의사가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버님의 기대감과 기다림이 아니셨나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뭔가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룬 것 같은데요.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 그래도 제가 한 직업을 선택하게 되고 밥벌이 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제가 초등학교 1학년 첫 시험을 보고 난 후 일어났던 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7살에 입학했습니다.
보통 입학하는 학생들보다는 1년 앞섰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 친구분들은 제가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고 내년에 다시 보내라고들 하셨다고 합니다.
입학 직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거나 지시를 내리면 저는 선생님을 쳐다보지 않고 땅바닥에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네요.
그래서 아버지도 큰 기대를 하고 계시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첫 시험 전까지는요.
그렇게 첫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제가 그때 세 과목 모두 100점을 받았습니다.
그때 당시 학교까지 3.5km를 걸어 다니던 때였고 아버지는 제가 너무 작아서 1학기만 매일 오토바이로 태워주시고 또 태워오시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방과시간 즈음이면 아버지는 학교 창문 밖에서 절 쳐다보곤 하셨었지요.
첫 시험을 치르고 채점된 시험지를 받아보던 날에도 아버지는 창문너머로 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시험지를 받아서 점수를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창문밖에 계시던 아버지에게 뛰어가 자랑을 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 시험지를 한참 나누어 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아버지는 그 시험지를 보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그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 아버지의 얼굴이 아마도 저를 지금까지도 붙들고 안 놓아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도 없었고 뭘 해야 될지도 몰랐지만 다만 아버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성적이 좋지 않거나 실패할 때도 늘 아버지는 넌 잘할 수 있다. 다음엔 더 잘할 거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한 번도 저를 나무라거나 혼내신 적이 없으셨어요.
오히려 그게 더 무섭다고 해야 할까요?
아버지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살게 되었거든요.
치과의사가 되고 난 지금도 사실은 아버지가 우리 아들 치과의사다 이렇게 자랑도 해주시고 뿌듯하게 생각해주시는 것이 제일 힘이 됩니다.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첫 시험 날의 아버지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언제나 인자하게 웃어주실 줄만 알았는데 요즘은 자꾸 화를 내시고 성격이 난폭해지십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화 한번 안내시던, 항상 너는 잘 할 거라고 격려해주시던, 저의 첫 시험지를 보고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고, 또 대학 합격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눈시울이 붉어지시며 웃으시던 아버지인데 요즘은 달라진 모습에 너무 속상합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도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착하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남들에게 해 끼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는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나이가 이렇게나 많이 들었는데 저는 아직도 7살 첫 시험지를 받아 든 꼬맹이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타던 경차 대신에 좀 더 크고 좋은 차를 구입하게 됐습니다.
경차도 불편함이 하나도 없었는데 아버지를 뵈러 장거리를 이동하기에는 많이 피곤하더군요.
더 편안한 차도 구입하였으니 이젠 더 자주 아버지를 뵈러 갈까 합니다.
그래도 제가 가면 아버지가 제 손도 꼭 잡아주시고 예전처럼 환한 미소를 보여주시거든요.
저의 첫 이야기는 어쩌다 보니 매우 낯간지러운 글이 되고 말았네요.
다음에는 치과에서 있었던 일상들, 소소한 이야기들을 풀어가 볼까 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어떤 주제의 글이 올라올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글 솜씨가 좋지 않다 보니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두 번째 글이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 벚꽃치과를 방문해 주신 환자분들,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 항상 행복하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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